top of page
작성자 사진RollingTea 구르다

대설 : 두 사람이 매일 마시기_내외살림


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동장윤다 차살림법

















여전히 일 년에 몇 번 정도는 그날의 그녀를 생각한다. 입하 날에는 그녀와 만났던 옛날 감정을 더듬어 가며 글을 썼다. 그녀를 초대해 가졌던 첫 찻자리도 생각났다. 우리는 함께 참 많은 것을 했고, 또 했다. 이른 봄에는 유치하지만 찬란하게도 후레지아 꽃을 꼭 사다 주었다. 여름이면 창 뚫린 카페를 찾아 몇 시간이고 떠들며 맥주를 마셨다. 단풍이 들면 산을 찾았고, 겨울이면 강원도로 여행을 떠났다. 나는 즐거운 삶이란 반복되지 않는 것들의 변주곡이라 믿어 왔는데, 그녀와의 일 년, 일 년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되풀이 하는 일이 점점 좋아졌다. 우리는 차로 두 시간은 족히 걸릴 거리에 살았고, 취향은 지구 반대편만큼 떨어져 있었지만, 이윽고 함께 시리즈물을 기다리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를 일부러 생각하지 않아도 되면 좋으련만, 하고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별로 없다. 나는 이따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맞힐 정도로 그녀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지만, 반대로 한 번씩 그녀의 피식거리는 웃음에 등골 이 서늘해질 때도 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내 아내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반대하지 않는다. 순종적이지도 않고, 의견 없는 모지리는 더더구나 아닌데도 말이다. 오히려 그런 지점 저 너머에 있다고나 할까. 생각해 보면 그녀는 나를 한순간도 부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저 사람에게 어떤 남편이어야 할까. 내 딸이 태어나기 얼마 전 나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모두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결심에 대해 그녀는 여전히 미온적인 반응이다. 그래서 일 년에 몇 번 정도는 그녀를 곰곰이 생각해 보곤 한다.











우리가 같이 마시는 차는 물에 물 탄 듯 그렇게 미적지근하고 평범하게 흘러간다. 우리는 하루 대부분을 같이 지내고, 같이 밥을 먹는다.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공간에서 이리저리 서로 왔다 갔다 하며 돌아다닌다. 별로 닮지도 않은 두 사람을 이리도 묶어 주는 건 무엇 덕분일까. 화려하지도 멋들어지지도 않은 시시콜콜한 잡음 사이에서도 씩 웃고 넘어가는 여유는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차 이야기를 하는 공간이니 찻자리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차는 분명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있지만, 그것이 특별한 재주가 있어 이상한 마법을 부린 덕분은 아니다. 우리는 이따금 서로를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사이에 차가 있을 뿐이다. 차는 마술 지팡이가 아니라 좋은 도구일 따름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그녀는 새벽에 홀로 일어나 차를 마시고, 나는 아침에 일어나 그녀가 끓여준 물로 차를 마신다. 오후에는 함께 앉아 마시고, 이따금 오전부터 함께 마시기도 한다. 내가 했던 생각들을 그녀도 하고 있었던 걸까. 그녀에게 묻고 꺼낼 말들을 차를 마시며 생각하듯, 그녀도 차를 마시며 나와 나눌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고 있었던 걸까. 오늘 우리는 논두렁에서 볏단을 주워 블루베리 묘목의 기둥을 감싸고 들어와 차를 함께 마셨다. 나는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내년에는 조금 더 비옥한 땅이 되고, 그 땅에서 더 힘차게 잎이 솟아나면, 더 맛있는 열매가 나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천천히, 차곡차곡, 우리는 또 함께 한 해를 보냈구나, 라고 차 한 모금에 그녀를 생각했다.












조회수 303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Comment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