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茶事茶難)한 하루 7화
17세기 초 신부이자 시인이었던 존 던(John Donne)은 이렇게 썼다.
“사랑의 신비는 영혼 속에서 자라지만 / 육체는 사랑의 책이니라.”
육체는 사랑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영혼과 육체간의 소통은 놀라운 흥분을 일으킨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에 빠질 때라야 가져볼 수 있는 일종의 부활의 느낌을 선물한다. 이 부활 안에는 양극의 모순이 함께 한다. 육체를 갈망하는 욕망과 상대를 추앙하는 경배, 상대에 대한 동경과 포만감, 정절의 약속과 동시에 때때로 일어나는 음란함 같은 것들 말이다. 인간은 이 선물을 열어봄으로서 비상한다. 사랑에 빠져 솟아오르는 인간의 날개 한 쪽은 무한한 자유로움을 그리고 나머지 한 쪽은 속박의 깃털로 채워져 있다. 이성이 용납할 수 없는 이러한 양극은 도리어 우리의 몸과 마음을 활성화시킨다. 그래서 우리를 경계선상에 머물게 하고, 균형이 허물어질 때 느낄 수 있을법한 아찔함을 가져다준다. 사랑에게 적이 있다면 그것은 증오가 아니라 자만과 무관심일 것이다. 당신은 지금 사랑하고 있는가? 그런데 모순의 회오리 안에 갇혀 본 적 없다? 아, 불행한 사람. 당신은 그저 초원의 풀밭 위로만 끝없이 걸어가는 여행자인가 보다. 인생이 푹신푹신한 풀밭 끝 수직 낙하하는 구덩이라면 사랑은 그 길을 피해 둘러 가라는 메시지다.
이카루스(Icarus)는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천재 발명가 다이달로스(Daedalus)의 아들이다. 그들은 크레타(Crete)의 미노스(Minos)왕의 환대를 받아 풍족한 삶을 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왕비가 황소와 간음하여 낳은 자식 미노타우루스(Minotaur)를 가둘 미궁을 설계하라는 명을 받고, 그들 또한 이 사건에 연루되었음이 드러나 미궁 속에 던져지게 되었다. 다이달로스는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아들과 함께 미궁을 탈출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너무 높이 날지 말라 경고하지만 속박에서 풀려 자유를 얻게 된 아들은 고무된 나머지 하늘 높이 오르기 시작했다. 태양과 너무 가까워진 까닭으로 밀랍으로 된 날개는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카루스는 에게해로 추락해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서양 문학사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탐구심과 호기심, 그리고 열망을 상징하는 모티프(motif)가 되었다. 또한 우리는 이 안에서 사랑에 빠진 한 인간이 겪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카루스의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편집하느냐에 따라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진 순간을 날개를 달고 미궁을 빠져나오는 때라 생각해 본다. 길었던 삶의 미로 속 어지러웠던 때를 벗어날 기회를 얻은 당신은 설레임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미로는 같은 길을 열 번이나 지나쳐도 다시 돌아올 열 한 번째 길을 예감할 일 외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보인다. 그 때 당신은 날개를 얻는다. 그 사람의 손길이 비로소 새하얀 날개로 돋아 해방감을 느끼며 하늘로 날아오른다. 한 번 마주한 손길이 그리워 더 가까이 다가간다. 끝없이 안아줄 것 같은 그 따스함에 이끌려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른다. 어느새 손 뻗으면 닿을 듯 가까워진 그 때, 당신의 사랑은 녹기 시작한다. 이유를 알 수 없다. 당신은 날개가 밀랍으로 만들어져 있었단 사실을 몰랐던 걸까. 왜 그토록 가까이 날면 안 된다는 말을 들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유의 날개가 먼저 녹는다. 자유를 기꺼이 녹여버리고서도 당신의 마음은 여전하다. 그래도 견딜 수 있다. 하지만 너와 나를 연결했던 구속의 날개마저 녹아버렸을 때 당신은 비로소 추락하는 일만이 남아 있음을 깨닫는다. 당신은 바다로 추락한다. 사랑에 타버린 몸뚱아리가 고통스러운가, 추락하는 공포가 더 무서운 것일까.
두 번째는 당신이 미궁에 갇히게 된 시점에서 시작한다. 당신의 사랑은 미궁과 같다. 다만 스스로 건설한 세계다. 시작은 경외심이었다. 자기 스스로 창조해 낸 이 사랑의 통로 안에서 당신은 매번 새로움을 느낀다. 어디로 가면 무엇이 나올지 다 알고 있다 생각하지만 하루, 이틀, 사흘, 당신은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확신이 줄어든다. 확신이 빠져나간 빈 자리에는 놀라움과 새로움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이 자리 잡는다. 당신은 조금씩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이 생소하지만 더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이윽고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당신의 인생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때가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상대에 대한 확신이 생기는 만큼, 스스로에 대한 확신의 크기는 줄어든다. 미로는 끝이 없고 어디가 시작이며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다. 사랑의 규모를 헤아릴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크기가 당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했을 때, 비로소 사랑이 지닌 양단의 칼날의 무서움을 인정하게 된다. 하나의 벽 사이로 갈라진 저 두 갈래의 길은 천국과 지옥으로도 당신을 인도하기도 하고, 그 길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을 희열과 절망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어딘가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이미 당신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마음에 난 생채기는 이제 다음에 찾아 올 기쁨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그래서 당신은 그만 걷기로 결심한다. 그 때 하늘에서 날개가 내려온다. 당신을 중심으로 시계 방향을 그리며 내려오는 날개에는 자유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당신은 정신없이 날개를 등에 붙인다. 그리고 미로를 탈출한다. 지면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당신의 다리 아래로 미로는 더위를 앗아간 가을바람에 시들어 가는 여름 장미처럼 말라간다. 그 모습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당신의 마음에는 멍이 남는다. 멍은 사라져가는 풍경들처럼 이윽고 점이 되어 사라진다. 그 때가 당신의 왼쪽 날개가 녹아 사라지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속박의 날개가 먼저 녹는다. 역설적으로 당신은 더 큰 자유를 느낀다. 바람은 더 높이 올라가지 말 것을 경고하지만 자유로움이 당신의 가장 큰 위안이자 유일한 친구인 시점에 이르러 모든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 온전한 자유는 우리에게 오만함을, 무관심을 불어 넣기 때문이다. 추락하는 당신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저 아래의 점을 바라본다. 이미 시들어 모든 담벼락이 허물어져버린 그 곳은 더 이상의 미궁이 아니다. 미궁이 아니므로 모든 것이 뻔하디 뻔한 들판에 다름 아니다. 당신은 스쳐가는 폐허를 가슴에 품고 차가운 바다 속으로 내동댕이 처진다.
12세기 프랑스의 시인 크레티앵 드 트루아(Chrétien de Troyes)는 『사자를 거느린 기사(Yvain ou le Chevalier au Lion)』에서 고상한 성품의 이뱅(Yvain)이란 기사를 브로셀리안드(Broceliande)가 별세계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이뱅은 마법의 우물을 추적할 운명을 부여받는데 그 과정에서 우물의 보호자와 결투를 벌인다. 이뱅은 그를 죽이고 그의 아내였던 미인 로딘(Laudine)과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잃고 슬픔에 빠져 울기만 했다. 시종이 말하기를 왕국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가장 용맹한 왕국의 보호자를 얻는 일이라고 조언하고, 결국 장례가 끝난 뒤 둘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고작 2주가 흐른 뒤 이뱅은 왕국의 한 기사로부터 진정한 기사의 숙명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뱅은 신부에게 1년 안에 모험을 마치고 돌아오겠노라 약속한다. 하지만 기사도의 모험에 몰두한 나머지 약속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로딘은 메시지를 띄운다. “당신은 집에 돌아올 생각은 하지도 않는군요.” 이에 이뱅은 죄책감으로 정신이 나가버리는데, 숲 속에 틀어박혀 야수처럼 살아가게 되고 만다. 그는 언젠가 거대한 뱀에게 죽을 뻔 한 사자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 사자는 어디를 가나 충성스러운 그 황갈색 갈기를 휘날리며 이뱅을 따랐다. 중과부적인 싸움이 일어났을 때 사자는 몸을 던져 주인을 구해내고 그 희생으로 말미암아 이뱅은 정신을 되찾아 로딘의 호의를 되찾기 위한 새로운 여정을 떠나게 된다.
이 이야기 안에는 재미있는 메시지가 숨어 있다. 역경의 극복으로서의 보상이 곧 사랑이라는 인식을 뒤집어 놓았다. 이뱅이 수호자를 물리치고 왕국과 여인을 손에 넣었음에도 그것이 곧바로 사랑으로 치환되는 것은 아니다. 쓸쓸한 야인으로서의 삶만 남았을 뿐이다. 로딘은 역경이 닥쳤을 때 무기력했지만 그것을 극복하게 되었을 때 이뱅은 떠나고 홀로 남아 외로움만 남는다. 두 사람은 각자의 역경이 인생을 가로막았을 때 사랑으로 이를 극복하지 못한다. 작품의 말미에 가서야 이뱅은 아내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일 뿐이다. 그는 사랑을 되돌리려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랑와 이카루스의 추락 사이의 중요한 아이러니를 발견하게 된다.
사랑은 이카루스의 과정을 되감는 모양새다. 절망에서 발현된 사랑의 귀함을 알지 못한 채 당신은 추락 했었다. 실수를 깨달았던 때가 날개가 녹은 순간이며, 모든 것을 되돌리기 위해 한시바삐 미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수호자를 죽인 이뱅은 로딘을 만났다. 하지만 이것은 죽음의 전조와 같았다. 쉽게 얻은 것은 가볍게 버려지곤 한다. 애초에 사랑했던 마음을 잊어버리고, 목표를 좇아 사랑의 약속을 소홀히 했다. 이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사랑에 실패해 추락하는 이뱅을 상상한다. 이윽고 그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이미 너무 높은 곳으로 올라가 돌이킬 수 없이 녹아내리는 날개를 발견한다. 로딘의 마음을 돌리겠노라 결심하는 그는 미궁으로 날아간다. 도망쳤던 곳으로 돌아가는 그 모습은 실망이나 무기력함에 젖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랑은 되감기의 과정을 통해 얻는 것이니까. 아이러니할 수밖에. 당신이 당신 곁의 그 사람을 얻게 된 것도 이 덕분일 것이다. 그러니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다 하여 쉽게 버려서는 안 된다.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로 극복할 텐가. 저 멀리 미궁이 보인다. 우리는 늘 탈출을 꿈꾸지만 미궁이 그저 광활한 목초지에 불과했다면 당신은 죽음같이 어두웠던 바다 깊은 곳에서 다시 태어날 기회도 가져보지 못했을 테니까. 날개의 불탄 자국이 점점 옅어져도 정상에서 바라본 땅 위엔 그저 편평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로 가득해서 어디로 되돌아가야 할지 결코 찾아내지 못 할 테니까.
글. 정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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