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담다 : 한국·중국·일본의 차 마시는 그릇 13 - 소한에서 대한으로 (下)
옻을 칠했어야 할 부분에 저것이 웬 말인가. 꺽쇠가 균열의 양옆을 관통하여 마치 도로 위로 난 육교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세월의 힘으로 녹이 슬어 새까맣게 변해버린 색과 이물감이 단아한 청록의 청자빛깔 위에서 더 선명하다. 무슨 의도였던 것일까. 굳이 저렇게 해야만 했나. 본체가 영롱하고 아름다운 까닭에 심란해진다. 좌우로 살짝 기울어진 완의 전은 앞에서 보는 것과 뒤에서 보는 맛이 다르다. 앞은 똑바르고, 뒤는 살짝 기울어져 보이니 마치 좌우 어깨가 서로 삐뚤빼뚤 한 내 어깨를 보는 것 같아 자연스럽다. 그릇의 배를 따라 떨어지는 선은 인위적이기도 하고 자연스럽기도 해서 직선인 듯 곡선 같고, 곡선인 듯 바로 떨어지는 것 같아 지루하지 않다. 영롱한 빛깔을 뽐내는 청록의 향연이 안과 겉에서 동시다발로 펼쳐진다. 자세히 보면 표면의 매끄러운 질감에 미세한 굴곡이 더해 다양한 심도를 연출한다. 안쪽 표면에 좌우로 아주 옅고 미세하게 퍼져나가는 파형의 무늬는 화려함과 우아함의 중심을 잘 잡아준다. 그 하단을 둘러 몇 개나 되는 꺽쇠가 마치 스테이플러처럼 박혀 균열이 간 이 아름다운 주인공의 삶을 억지로 이어가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주인공의 이름도 특이하기 이를 데 없다. 청자다완 명마황반(名馬蝗絆)이라 불린다.
균열은 이 그릇의 주인이었던 무로마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이 그릇을 손에 넣었을 때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의 주인이었던 다이라노 시게모리(平重盛)는 헤이안 시대의 무사였는데 요시마사 보다 무려 이백여 년은 옛 사람이다. 시게모리가 황금을 기부한 답례로 당대에 유명했던 선승 붓쇼(仏照禅師)에게 이 그릇을 선물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온화하고 유능했던 시게모리에서부터 어떻게 미적으로 탁월한 예민함을 뽐냈던 군주 요시마사에게까지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릇은 주인과 닮았다는 옛 말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 그만큼 이 그릇은 본체의 청자로서의 아름다움이나 수선 이후의 파격미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회자되는 물건이다. 주인공은 일본에 전래되어 내려오는 청자 가운데 단연 으뜸으로 평가 받는 대명물(大名物)이다. 용천요(龍泉窯)에서 생산된 기물들 중에서도 최고 수준에 속한 것으로 평가 받았고 요시마사는 이를 자신의 찻그릇으로 삼았음을 자랑으로 여겼다. 에도 시대의 유학자였던 이토 도우가이(伊藤東涯)의 저서 『바코우한사오우키(馬蝗絆茶甌記)』에 여기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사랑하는 그릇에 금이 가 있어 흠이라 여겨 크게 상심한 요시마사는 중국에 그릇을 전달하는 사절을 보내며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그릇을 하사해주시기를 간청하였다. 하지만 이미 시대는 남송시대를 훌쩍 지나 명나라에 접어 들었기에 이미 같은 수준의 청자를 재현하거나 구울 수 있는 가마가 남아 있지 않았다. 명나라는 황당하게도 다른 그릇을 보내지 않고 균열과 균열 사이를 철꺾쇠(鉄の鎹, かすがい)로 이어 붙여 되돌려 보냈다. 결과적으로 흡사 커다란 메뚜기처럼 보이는 꺾쇠가 붙어 이 다완의 이름은 한층 높아지고 마황반(馬蝗絆)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마황(馬蝗)이란 말의 등 위에 메뚜기가 앉았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중국어에서는 꺾쇠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름 있는 대명물에는 이름의 크기만큼 재미있거나 특별한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고, 이 다완 역시 그런 셈이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까지만 해도 중국에 대한 경애가 남달랐던 점을 떠올려 본다면 명나라의 이러한 특이한 응답에 대해 이 그릇의 이름이 드높아진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어차피 이렇게 해도 좋아하고 저렇게 했어도 좋아했을 테니까. 오히려 그만큼 희귀한 청자임을 증명한 셈이고, 거기에 더해 그만큼 보기 드문 장식물을 달고 귀환한 셈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한 명의 차인(茶人)이자 탐미주의자로서 요시마사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본적 없고 생각해 본적도 없는 파격 앞에 그는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시마사는 요시미츠의 손자다. 자신의 조부가 일본을 통일하고 천황을 오시하는 권력자였으며 그 힘의 상징으로 기타야마 문화를 일구고 금각사(金閣寺)를 세웠던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손자인 요시마사는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쇼군에 올랐지만 반대로 유약하고 힘 없는 무능한 군주였기 때문이다. 그는 오닌의 난이 일어나 전국이 반란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을 때도 고카와 저택((小川邸)으로 아예 거처를 옮겨 주연과 렌가회(連歌會)로 나날을 보냈다. 그는 후계자 문제로 부인과 싸워 본인이 집을 나갔고, 결국 모든 힘도 흥미도 잃어 출가해 스님이 되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할아버지 요시미츠를 닮고 싶었고, 할아버지가 펼쳤던 정책을 부활시키고 싶었다. 그는 젊은 시절 유능하고 과감하며 적극적인 군주였다. 할아버지의 사후 4대에서 7대에 이르는 동안 약해진 쇼군의 권한을 회복하기 위해 토벌령과 적극적인 인사개편을 펼쳤다. 하지만 지방의 유력한 다이묘들과의 권력 투쟁에서 결국 손을 들 수밖에 없었고 그 패배의 한 가운데는 정실부인 도미코의 친정가문이 있었다. 그는 손발이 다 잘린 채로 정치적으로 고립된 섬 안에 갇혀 살게 되었고 외부세계와의 문을 닫고 예술의 길로 침잠해 들어갔다. 눈에 보이는 번뜩이는 황금보다 자세히 보아야만 겨우 보일락 말락 한 은유와 상상의 가치를 더욱 귀하게 여겼다. 정원사 젠아미(善阿弥)와 가노파의 화가 가노 마사노부(狩野正信), 노가쿠의 명인 온아미(音阿弥)등을 곁에 두었고 당대 최고의 철학가이자 차인이었던 무라타 주코(村田珠光)에게 차의 방향성을 묻기도 하였다. 그렇게 반평생을 예술의 후원자로, 내면세계의 탐구자로 살던 그는 말년에 히가시야마에 히가시야마덴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의 은각사(銀閣寺)로 남아 있다.
그의 눈에 저 쇳덩어리가 무엇으로 보였을까. 평범한 사람이든 애호가든 관계없이 누구나 주저하고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 보라. 당신이 수 천 만원을 주고 몇 년을 기다려 구입한 청자에 저렇게 꺾쇠를 박아 돌려보냈다면 그 당혹스러움을 당신은 견뎌낼 재간이 있는가. 그렇기에 우리는 평범함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평범함은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평범함은 온화한 마음에 깃들고, 지극히 도드라진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결코 맛보지 못할 봄바람에 잔잔하게 찰랑이는 호수와 같은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평범하기 때문에 파격과 모험을 감수할 여력이 없다. 그러한 여력이 없기에 도드라지거나 축의 끝에 매달린 아슬아슬한 아름다움의 일면을 엿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다. 애당초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아름다운 기물의 흠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차를 사랑했던 일부 탐미주의자들은 흠을 감추지 않고 흠을 흠으로서 고쳤다. 균열이 가거나 떨어져 나가는 경우에는 옻으로 고치기 때문에 대부분은 금을 입히게 된다. 드물게는 은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는 바래서 금방 거무스름해지는 단점이 있다. 때로는 마키에(蒔絵)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로 최고의 경지는 흠이 생기기 전과 흠이 생기고 난 후의 그릇을 서로 다른 작품이라 여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예 다른 파편이나 조각, 이물(異物)을 찾아 흠을 메우는 방법도 있다. 일종의 콜라주(collage)인 셈이다. 물론 어떻게 해도 본래의 모습은 찾기 힘들다. 어떤 복원능력과 재료를 가지고서도 원래의 것으로 되돌릴 수는 없다. 아예 다른 조각으로 메우면 어떻게 해도 선과 면이 어긋나지만, 오히려 완전히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 할 기회가 생긴다. 이음새의 흔적을 감추지 말고 그대로 노출시키는 편이 정형의 지루함을 덜어 완전히 새로운 길을 보게 하는 단서를 제공할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의 주인공에 눈이 가는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본체가 아름답고, 말뚝처럼 선명하게 박힌 꺽쇠가 눈에 도드라지기 때문 아닌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가지 이유가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서로를 돌보고 있다. 저 그릇이 아름다울지언정 송휘종(宋徽宗) 대의 청자만 하겠는가. 저 그릇의 창의성이, 유려함이 독보적이라 단언할 수 있겠는가. 저 꺽쇠 없이 본체의 우아함만으로 국보가 될 수 있겠는가. 반대로 저 균열을 옻칠하고 금박을 입혔다면 수선의 아름다움을 잘 살린 경우로 후대가 본받을 만 한 가치로 남을 수 있었겠는가. 요시마사가 주인공을 사랑한 이유는 아름답고 고귀하게 태어난 자가 결코 누릴 수 없던 자유로움이 저 그릇에서 엿보였기 때문 아니었을까.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유행하듯 만들던 일그러뜨리고 찌그러진 의도된 파형의 그로테스크함은 자유분방해 보이지만 결코 감상자로 하여금 자유로운 기분을 느끼게 하지 못한다. 내가 그로테스크나 바로크 성향을 기호하는 이유는 일그러짐과 파격은 자칫 달콤함과 편안함에 빠져 나태해지기 쉬운 삶과 목적에 명확함과 일정한 강도의 자극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로테스크란 기괴한 것에 대한 흥미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악을 선으로 대치시키기 위한 노력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무미건조해 보일지언정 파격에는 건강함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솔직한 것만큼 건강한 것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더 있을까. 흠을 흠이 아닌 것처럼 꾸밀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무어 나쁜가. 이를 통해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음을 기대하거나 부담으로 느낄 이유도 없지 않나. 그저 다른 존재가 될 뿐이다. 그렇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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