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윤다 차살림법 : 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2부_16장
차살림 준비
_꽃
한 남녀가 투덕거리고 있다. 둘 사이의 문제는 지극히 사소한 것에서 출발했지만 점점 언덕 위의 눈덩이처럼 굴러가고 있다. 남녀 사이의 문제란 것이 팔 할이 감정 다툼인데 많은 전문가가 소통을 그 원인으로 꼽는다. 나와 내 처는 연애 시절보다 결혼하고 곱절은 대화를 많이 하니 예외로 치더라도 많은 이들이 연애 시절과 달리 줄어드는 말수에 전전긍긍한다.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달까, 낯부끄럽달까. 소통이란 무엇일까. 疏通이라고 쓰니 뜻이 두 가지다. 첫째로 ‘막히지 않고 잘 통함’이고, 둘째로 ‘생각하는 바가 서로 통함’이다. 첫째는 사물 간의 물리적인 소통을 의미하고, 둘째가 생명 간의 감정 혹은 영적 소통을 의미한다. 연인 간에, 부지불식간에 서로 화해할 때 일어나는 상호 이해나, 키우는 동물의 눈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서로 간의 사랑 같은 것 모두 소통의 두 번째 의미에 속한다. 그러고 보면 소통은 글과 말로도 가능하지만, 그보다는 말 밖의 말로 일어나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비언어적, 반(半)언어적 영역이라고 부른다.
문자가 가진 가장 훌륭한 덕목은 이어짐이다. 현재까지 우리가 가진 정보를 전달하고, 의미를 이해시키는 가장 과학적이고 효과적인 수단이다. 문자를 통해 언어를 발전시키고 인류는 학습을 통해 제곱의 속도로 문명을 발전시켰다. 고대 그리스 시절의 철학자들의 지능과 21세기 석학들의 지능과 사고력이 다르지 않음에도 가진 정보의 크기가 차이 나는 것은 순전히 문자의 덕이다. 그래서 인간은 수 천 년에 걸쳐 내가 가진 정보를 보다 잘 전달하기 위해서 언어를 발전시키는 데 삶을 바쳤다. 거시적인 크기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과학자들만큼 인류의 발전에 이바지한 것은 시인들이었고, 철학가들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뜻을 상대방에게 전달하기 위한 마땅한 표현이 없다면 사람들은 바로 그들을 찾아갔기 때문이다. 문학과 철학은 언어를 만들고, 넓히고, 풍족하게 일궜다.
다만 석가모니는 그러한 영역에 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문자로 자기 뜻을 남기기를 거부했다. 그는 열반하며 제자들에게 자신이 남긴 법과 율을 섬으로 삼아 수행에 정진하라고 했다. 사마타(samatha, 止)와 위파사나(vipasyana, 觀)라는 당시에 이미 존재하던 개념을 사람들에게 수행법으로 골라 전해준 것 역시 수행을 완성하는데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감에서 벗어나 충분히 익숙한 것들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석가모니가 어느 설법 자리에서 꽃을 들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던 것은 앎을 깨닫는 것은 지극히 개인만의 일이고, 이를 온전하게 손실 없이 전달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가르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치 물리학에서 손실 없이 에너지를 전달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점이라는 사실처럼 말이다. 물론 영화<아바타>에서 파란 피부의 나비족과 인간이 전쟁을 벌이는 이유가 바로 가상의 한 물질 ‘언옵테늄’ 때문인데, 이 물질은 온전한 에너지 전달을 가능하게 해준다. 인류의 꿈의 물질이고 이것이 나비족의 행성에 대량으로 존재해 뺏고 지키는 싸움이 일어난다. 우리가 발전소에서 에너지를 어떻게 전기로 전환하는 줄 아는가? 우리 인류가 가진 가장 효율적인 전환 방식은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전히 ‘물을 끓여 터빈을 돌리는’ 방식이다. 그 이상 효율적인 것은 없다. 그렇게 과학이 발전하는 동안 여전히 우리는 원자력 발전소에서 핵분열을 일으켜 만든 어마어마한 열로 물을 끓여 전기를 만든다. 그러니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손실 없는 전달이란 그야말로 꿈의 영역에 가깝다. 재미있게도 석가모니의 설법 역시 이와 같다. 손실 없는 의미의 전달이란 온전히 이성의 영역에서 가능하지 않다.
석가모니가 진리의 섬에 자신을 가두고 정진하라 한 것은 문자가 가진 한계 때문이다. 제자들이 경전에 의지한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스승이 돌아가시고 나면 모든 것이 거품이 되어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이다. 스승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위로했지만, 제자들은 스스로 모여 법과 율을 담아 경전을 써 내려갔다. 그들은 스승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라 모든 구절을 ‘내가 스승에게 듣기로’라는 형식을 빌려 적었다. 나의 해석이 아니라 스승이 가르치신 그대로라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아무리 순수한 의도로 한 일이라도 세대가 몇 번 바뀌면 그 의도는 사라지고 문자만 남는다는 점. 다른 하나는 석가모니가 인간의 몸을 빌었기에 언어를 사용했을 뿐 언어로 모두 전할 수 없기에 꽃을 들어 자기 설법의 한계를 보완했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후대로 갈수록 불교는 저 말 그대로 고립된 섬에 갇혀 자신의 우월함만 뽐내다 스러져 버렸다. 달마는 중국으로 건너가 실낱같이 살아남은 불법의 끈을 되살렸고, 불교의 본고장에서 그들은 외면받았다.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이는 부처님의 법과 율을 알 수 없으니, 문자를 아는 이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공양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가성 상품이 되고, 평등을 가장 큰 힘으로 삼아 큰 불교가 불경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간의 위계가 나뉘어졌으니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슬픈 일인가.
그런데 주위의 그 많은 사람 중의 오로지 제자 마하가섭 한 명만이 웃었다고 한다. 석가모니의 뜻을 알아챈 것이다. 이것은 조조의 계륵(鷄肋)을 알아챘다는 눈치 빠른 양수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불교에서 조사(祖師)의 깨달음은 오직 다른 조사 한 사람에게만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는 말할 수 없으나 조사선(祖師禪)의 황금기였던 중국 선종 불교의 마조도일에서 임제의현에 이르는 한 세기 넘는 세월의 업적을 보자면 틀린 것도 아닐지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석가모니가 꽃 한 송이를 들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이심전심(以心傳心), 즉 온전한 뜻은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만 전할 수 있다는 배움에 이르렀다. 달마의 제사에 쓰였다는 저 멋진 문장, ‘한 송이의 꽃으로 천지의 봄을 연다’라는 말은 비록 문자의 힘을 빌려 효율적이고 빠르고 널리 사람들에게 알릴지는 못하여도, 왜곡되거나 불필요한 해석이 들어가는 일 없이 마음과 뜻을 전할 수 있다면 그 힘은 절대 사라지지 않고 차곡차곡 주변으로 번져 나가 결국 당신이 바랐던 꿈과 목표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란 응원이자 위로다.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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