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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RollingTea 구르다

깊은 산속 옹달샘, 그 위로 비치는 것


보듬이의 새로운 여행 : 임만재 작가를 만나다











소년, 둥그런 달도 빚어 올리겠네


창문 너머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물레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도공들이 자리에 앉아 발로 물레를 차고 있다. 나무 물레 위에 놓인 채 휘휘 돌아가던 흙덩이는 물에 젖은 도공의 손안에서 맨들맨들 빛을 내다 쑤욱 위로 튀어 올랐다. 쉴 새 없이 도는 물레 위로 미끈한 사발이 보이는가 싶더니 순식간 도공의 얼굴만 한 항아리로 변했다. 세상이 멈췄다. 물레만이 거침없이 돌고 돌았다. 소년은 눈을 뗄 수 없었다.


남원 땅에서 가족들과 함께 길을 찾아 김해로 넘어온 소년은 요업에서 장작 패는 일을 돕게 되었다. 체격이 듬직하고 힘도 좋았던 터라 어린 나이에도 장정 몫의 일을 곧잘 해냈다. 가마에 군불로 들어갈 장작을 쪼개던 어느 날 작업장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날 이후, 자려고 누워서도 마법처럼 그릇을 밀어 올리던 물레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물레 앞에 꼭 앉으리라. 장작 패는 일을 열심히 하자 승진을 했다. 수비 작업을 포함한 흙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손에 직접 흙을 쥘 수 있게 되자 신이 났다. 힘을 냈다. 몇 달 채 되지 않아 작업실에 들어섰다. 그는 흙 꼬막을 미는 일부터 배웠다. 이윽고 물레에 앉을 기회가 왔다.


잠시 빈 물레를 돌려 보았다. 짚으로 감싼 물레 둥치를 발바닥으로 툭툭 차면 돌아가기 시작한다. 세게 차고, 강하지만 밀어내듯 차고, 미는 듯 당기는 듯하다가 다시 세게 차고. 어떻게 차도 물레는 돌아가지만 동시에 아무렇게나 돌아가지 않았다. 하루하루 물레 위에 올린 흙덩어리를 만지면서 뒤틀리거나 바로 서거나 하는 모양새를 바라보며 소년은 생각했다. 내가 기분을 내는 대로, 발을 차는 방식대로 물레는 거짓 없이 모두 드러낸다. 물레에는 마음이 깃드는 것일까. 신비한 느낌으로 가슴이 떨렸다. 돌아가는 물레 안에는 온 우주가 담겨 있는 듯했다. 거대한 달도 빚어낼 수 있겠다는 충만함이 가슴을 채웠다. 아무것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곳은 물레 위였다.







소년은 친구들이 학교에 갈 때 물레 앞에 앉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흙을 주물다가 지쳐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흙과 땀에 찌든 아들의 옷을 빨았다. 놀이터에서 돌아온 아이의 때 묻은 옷을 씻어내는 마음과 같을 수가 없었으리라. 그렇기에 소년은 더욱 매진했다. 꼬박 이 년을 김해요업에서 일했다. 물레질에 능숙해지면 질수록 더 정교하고 의미 있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요업을 떠나 진례에서 활동하던 종산 배종태 선생의 작업실에 도제로 들어갔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작업실의 대장이 되었다.

소년의 눈은 물레를 대하는 순수한 열망으로 반짝였으리라. 하지만 운명은 가혹했다. 병마가 깃든 것이다. 그는 봄이나 가을이 되면 어릴 적부터 피를 뱉어내곤 했다. 기침에 섞여 나오던 피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은 주변의 상황도 상황이었겠지만 워낙 키도 크고 힘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증상이 해를 더할수록 심해졌고 이윽고 대장직을 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폐절제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치료 시기가 너무 늦었고 결핵도 심했다. 바싹 야윈 소년은 반년여를 집에 누워 지내야 했다. 고비를 넘어서자마자 소년은 마치 선원이 사이렌의 노랫소리에 이끌리듯 물레를 찾아 집을 나섰다. 하루에 다만 반나절이라도 물레를 돌릴 수 있는 작업장이 간절했다. 네댓 시간을 집중해서 일하고 나면 숨이 차고 어지러웠다. 그는 그저 참아냈다. 운명의 장난에 휩쓸리거나 협상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받아들이고 묵묵히 물레를 돌렸다.



쓰기로는 ‘井戶’, 읽기로는 ‘아름다운 그 무엇’


어느 날 요장 주인이 넓적한 사발 하나와 책 한 권을 슬며시 내밀었다. 이것 한 번 만들어볼 생각 없느냐는 질문에 청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당시만 해도 도자 작품이라 하면 단연코 항아리가 으뜸이었다. 큰 항아리를 물레로 돌리는 것은 장인의 경지여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커봤자 손바닥 두어 개 합쳐 놓은 듯한 사발 따위는 아이들 장난 같았다. 호기롭게 승낙하며 시작한 이 일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한국의 흙과 물로 한국인이 빚어 만든 찻사발이 일본에서 큰돈으로 거래되던 때였다. 손재주와 집중력으로 또래에서 비견할 만한 사람이 없었던 임만재 대장에게 요업 주인은 기대하는 바가 컸다. 예상을 비껴가며 그의 첫 도전은 무참히 실패했다. 그 사발은 작지만 작은 그릇이 아니었다. 모양을 흉내 내 빚으려 하면 할수록 결과는 엇나갔다. 멋도 없고 힘도 느껴지지 않는 시시한 사발이 될 뿐이었다.


처음 물레 앞에 앉았던 소년이 청년으로 자라는 사이, 그릇 빚는 일로 실패를 맛본 일은 좀처럼 없었다. 생경한 실패의 경험은 청년의 마음에 다시 한번 불을 지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발 사진들을 구해서 보고 또 보았다. 사발의 몸이 되는 흙을 연구하고, 유약 실험을 해나갔다. 사발의 선을 손에 익히느라 끝없이 물레를 돌리고 또 돌렸다. 천장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물레를 상상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즐거웠다. 그렇게 시작된 도전은 십여 년 넘게 이어졌다. 차차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자신만의 작업실이 간절했다.


마침내 청년은 자신의 가마를 세우고, 정호가마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호는 이도 그릇을 뜻한다. 사발에 대한 그의 순수한 열망이 고스란히 담겼다. 도공으로서 열의도 재능도 한껏 차오른 청년이 처음 맞닥뜨린 비범한 예술품, 아름다운 그 무엇이었던 까닭이다. 최고의 이도 찻사발을 만들어내는 데 도공으로서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충실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큰 상도 받고 명성도 쌓여갔다. 청년은 찻사발로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명인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알 수 없는 불편함이 마음에 쌓여갔다. 정체 모를 그 갑갑함이 슬금슬금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물레를 찼다. 그 순간만큼은 잊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물레가 멈추고 작업실을 나서면 다시 막막해졌다. 왜 그랬는지 당시에는 알 길이 없었다. 청년 임만재는 그릇 빚는 도공을 넘어서 작가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깊은 산속 옹달샘, 그 위로 비치는 것


일본이 사랑하는 조선 그릇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정호(井戶), 운학(雲鶴), 능천(能川), 오기(吳器), 어옥(魚屋), 김해(金海) 등이 대표적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맛이 있는 것은 정호다. 정호 안에도 종류가 나뉜다. 대정호, 고정호, 청정호, 정호협 같은 것들이 있다. 현재 일본에는 국보나 보물급의 대명물 정호가 스물여섯 개 있는데, 일본 차인들은 20세기 중반에서 후반으로 들어설 무렵부터 우리나라에서 이 이도 그릇들을 재현하거나 모방한 것을 사들여 찻그릇으로 사용했다. 이도는 투박한 듯 자연스러운 멋이 개성이지만, 그런 이도를 재현하려면 엄밀한 규칙에 따라 기술을 익히고 조합법을 따라야 했다. 어떤 틀에도 메이지 않은 듯 힘이 넘치는 역사 속 그릇을 닮게 만드느라 틀을 지키고 절제하고 반복해야 했다. 어쩌면 무시무시한 스승 아래 기예를 다듬는 도제의 소임과 닮았다. 길고 힘든 도제의 시기를 마쳤을 때, 마침내 그가 체득한 것은 무엇일까.


물레에 대한 순수한 열망에서 시작해 이도를 가장 멋지게 재현해내려는 패기로 가마를 세우고 굳건히 섰다. 도제 기간을 무사히 마치고 장인 자격을 얻은 것과 다름없었다. 기술만 잘 펼치면 탄탄대로를 이어갈 수 있을 터였다. 희한하게도 이도 재현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면 끌수록 청년의 마음은 막막했다.


그 무렵 어느 날, 정동주 선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여러 해 전, 찻사발 공모전에 출품한 작품을 보고 응원의 전화를 주셨던 것이 첫 만남이었다. 보듬이를 한번 만들어 보시게. 그것이 시작이었다.


보듬이를 만나 깨달았다. 폐쇄적인 이도의 규칙성, 모범으로 삼을 전형이 정해진 작업은 청년의 자유로운 영혼을 가두어 놓는 듯했다. 반면, 보듬이는 지금 내가 하루하루를 살 듯, 나와 숨을 나누며 만들어나가는 그릇이다. 똑 닮게 쫓아가야 할 어떤 이상적인 형상도 없다. 형태의 틀로 삼을 최소와 최대치 기준만이 있을 뿐이다. 흉내 내 연습하고 답안으로 삼을 모델이 없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두렵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한 자유를 내어준다. 청년은 새로운 아름다움에 목이 말랐다. 편안한 생활이나 명성이 보장되는 기술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없던 아름다운 무언가를 빚어낼 힘을 키우고 싶었다.








정동주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숲새미. 깊은 숲일수록 맑은 샘이 솟는다. 그 샘물로 숲속 만물이 하루를 살고 계절을 지나고 생을 이어간다. 언뜻 보이지 않는 그 모든 순환과 연결고리는 그저 고요하게 잇따른다. 임만재 작가는 오 년여의 보듬이 작업을 통해 누구나 알고 있는 전형적인 사발의 틀에서 자신을 해방했다. 닮아야 할 대상이 사라지자, 진즉 그릇에 담았어야 할 나의 마음이 도드라졌다. 처음에는 당황했고, 버거웠다. 흙도 물레도 불도 내 몸처럼 익숙한데, 거기에 담기고 채워야 할 무언가는 낯설었다. 언젠가 그랬듯, 작가는 그저 견뎠다. 요행을 바라지 않고 정직하게 흙을 반죽하고 유약으로 쓸 재를 구웠다. 물레 앞에 앉아 제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연습을 거듭했다. 그렇게 바람이 일었다가 잦아들고, 비도 내렸다 그쳤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마당 잡초를 뽑고 비질을 한다. 흙집 벽을 살피고 화초를 돌본다. 보듬이를 만든다. 하늘도 보고 땅도 보고 보듬이도 본다. 승부욕에 불타는 작업이 아니라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조바심 없이 그저 할 일을 하는 일상이다.



보듬이를 바라본다는 것



물 위로 잠시 구름이 비친다. 푸르디푸르다. 백로의 하늘이 담겼는가. 찰나에 해가 뉘엿하다, 쪽빛 밤이 깊었다. 이윽고 새벽이 올 테지. 들여다보고 있자니, 깊은 숲 맑은 샘가에 누워 이울었다 차오르는 하늘을 오래오래 바라본 듯한 기분이다. 아, 보듬이구나 하는 느낌은 그릇 중배와 전에 이르는 선에서 가장 또렷하다. 작가는 흙과 불이 주고받는 수축과 이완을 깊이 이해하고 선을 뽑아낸 것임이 분명하다. 가로로 은은하게 흐르는 선에 힘이 있다. 어쩌면 그저 마르지 않는 작고 깊은 우물 그대로를 두 손에 옮겨 쥔듯하다. 신비로운 듯 편안하다.







보듬이를 보면, 저 안에 작가의 삶, 출발과 여정, 현재의 위치가 모두 담겨 있다. 그의 이전 작업을 줄곧 지켜보아 왔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게 느낄 것이다. 십 대 소년 시절부터 오늘까지 일일이 흙을 발굴하고, 숱을 구워 유약을 만들어 온 역량이 고스란히 담겼다. 언뜻 화려한 물감을 쓴 듯 보이지만, 사실은 돌과 나무에서 얻은 색이다. 이전까지의 작업이 무언가를 겉에 바르는 듯한 것이었다면, 무언가가 흘러 조금 묻었구나 싶은 단계를 거쳐, 속에서 뿜어져 나왔구나 하는 느낌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것은 작가의 삶과 심경이 거쳐 온 자리 그대로다. 사실, 고운 빛은 덧바르는 것이 아니라 충실히 여문 안에서 겉으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것일지 모른다. 그뿐인가. 푸근한 인상을 주는 보듬이 선은 젊음을 바쳐 익힌 물레 장인의 것이다. 틀을 버렸으되 그 틀을 익혀온 시간과 노력이 빛을 발하는 것이리라.







예술 전문 서적에 나오는 명작이 아니라, '지금' '이' 보듬이를 보고 바라보고 눈에 새기는 일은 그래서 매력적이다. 역사책을 들여다보고 작가의 전기를 읽고 평론가의 해설에 기대지 않아도 좋다. 좋은 것과 싫은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시대라는 틀로 작가에게 스며든다. 그 해, 그날, 그때의 작가가 바라본 풍경, 귀에 담긴 소리, 마음속 색채가 생생히 그릇에 담긴다. 보듬이를 완성해나가는 작가의 하루하루가 곧 오늘을 사는 누구나의 하루다. 숲새미 임만재 작가의 이 보듬이를 통해 당신을 어떤 날, 어떤 기억을 떠올리는가. 이제 중년의 작가가 되어 자신의 세계를 완연하게 피워내고자 하는 그의 세상에 당신이 어떤 점 하나를 찍을 계기를 던져 보는 것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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