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윤다 차살림법 : 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2부_37장
‘연리문’이란 익히다는 뜻의 ‘연(練)’에 다스릴 ‘리(理)’를 합한 글자다. 연습, 연마 등에 사용하는 글자 ‘연’은 이 문양이 얼마나 익히기 어려운 기술이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도 아름다운 저 인위적 배열의 물결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을까 싶은 궁금함을 자아낸다. 수면 위에 떨어진 기름방울이 멋대로 흩어지며 만들어내는 모양 같기도 하다. 혹은 미노타우로스가 살던 미궁의 설계도일까 싶은 생각도 든다.
1930년대 말 고유섭 선생은 <한국미술문화논총> 중 ‘고려의 도자공예’라는 글에서 이 말을 처음 썼다. 도자기 표면에 흔히 그려 넣은 그림과는 다른 무늬와 결은 겉보기와 다르게 의도된 것이다. 다만 극도로 추상적이어서 그 의미가 직관적으로 와 닿지 않아 설명하기 쉽지 않다. 이에 대해 고유섭 선생은 이 연리문이 12세기 고려청자의 한 종류라고 말했다. 독특한 형태와 무늬, 발달 과정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형성된 세계성으로 인해 일반적인 청자와는 다른 평가를 받았다.
사실 이 연리문의 기원은 우리와는 관계가 없다. 저 먼 옛날 고대 이집트에서 비롯하여 서아시아 전역에서 유행했고 당나라 때 중국으로 들어와 송나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이동 과정과 시간이 장대한 까닭에 이곳과 저곳의 결과가 조금씩 달랐다. 변화에 변화가 겹쳐 이동해 온 연리문의 시작은 기원전 3000년 무렵 이집트 사람들이 담홍색 태토 위에 하얀색, 빨간색, 검은색의 흙 등을 묽게 반죽해 흘러내리게 하는 기법을 쓴 것으로 출발했다. 물론 그 의도는 인위적이었지만 결과물은 우연에 가까웠다. 마치 아이들이 조몰락대는 찰흙 덩이에 한가득 기대와 의도 한 스푼이 섞여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시간이 흐르며 공예는 정교해졌고, 로마에서는 색이 다른 흙을 섞고 반죽하여 형태를 잡은 뒤 투명 유약을 입혀 구워내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여러 색 무늬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니 이를 더러 ‘애거트(agate)’ 혹은 ‘마블드(mabled)’라고 불렀다.
당나라에서는 이 무늬를 교태문(絞胎紋)이라 불렀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 교태와는 다른 뜻이다. ‘교’란 ‘얽거나 꼰다’라는 뜻이고, ‘태’는 ‘아이를 잉태한다’라는 뜻이니 남녀가 서로 얽혀 생과 삶을 자아내는 것을 뜻한다. 황제와 황후가 함께 밤을 거처하는 곳을 교태전(絞胎殿)이라 불렀으니, 자손을 건강하고 많이 낳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 글자 안에 녹아 있다. 새끼줄 따위를 꼬아 줄을 만드는 것을 ‘絞’라고 했으니, 무언가를 꼰다는 것은 두 가닥 이상의 줄이 필요한 법이다. 마치 베틀로 씨줄과 날줄을 서로 교차해 옷감을 만들 듯 선과 선이 교차하여 면이 되고, 작은 선 둘이 한데 만나 몇 배는 튼튼한 더 굵은 선이 되기도 한다. 마치 일 더하기 일은 이라는 상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교태문 안에는 하나와 다른 하나가 만나 둘 이상의 힘을 낼 수 있다는 삶에 관한 희망도 녹아 있다.
일본에서는 그 위상이 달랐다. 우리가 받아들인 고려 시절에서 수백 년이 지난 19세기 일본은 나름의 새로운 기법을 창안하고자 외국의 도자 기법을 새롭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아오키 모쿠베이의 시대이기도 했던 이때 일본은 연리문을 ‘연상수(練上手)’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연’은 본래 의미 그대로 익히고 다듬고 연습한다는 뜻인데, ‘상수’란 ‘끌어올리다, 모아들이다, 훌륭하게 마무리한다’라는 뜻이다. 연리문을 아름답게 완성하기 위해 수작업의 모양새와 힘듦을 표현한 말이다. 이를 일본어로 ‘네리아게데’라 말하고, 이것이 현대 서양 도자 학자들에게 감동을 주며 공식적으로 이러한 문양을 부르는 말이 ‘네리에이지(neriage)’가 되었다. 그리하여 현재 연리문은 유럽의 전통 방식인 마블링 기법과 일본의 형식인 네리에이지 두 가지로 나뉘게 되었다.
정작 우리나라에서 연리문은 큰 사랑을 받지 못했다. 우리가 가진 청자의 역량이 거대했던 까닭으로 그 하위 분류 중 하나로 존재하기는 했지만, 과정이 복잡하고 효율이 높지 않아 크게 유행하지 못했다. 다만 그 오묘한 추상성이 불교의 연기 사상을 상징한다고 하여 사찰에서 만들거나 썼다. 어쩌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연리문의 가능성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단순히 모양새가 아름다워 사랑받은 연리문에 그 이름에 걸맞은 뜻과 의미를 지어주면 어떨까. 선은 반드시 출발점과 도착점이 있다. 다만 직선이 아니라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고, 더군다나 둘 이상이 얽혀 있으면 종잡을 수가 없어질 뿐이다. 하지만 반드시 시작에는 끝이 있고, 때로는 더 큰 틀에서 그 끝은 다른 시작과 이어지기도 한다. 연리문이 무작위 비정형성의 연속 같아 보여도 마치 얽힌 실타래를 풀 듯, 배배 꼬인 우리 딸의 머리끈 덩이를 해체하듯 차근히 바라보면 모든 것에 의외로 원인이 있고 그 결과도 복잡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익히고 연마하기 어려운 것은 만듦새에만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우리의 삶을 창조하고, 가꾸고, 다스리는 모든 순간을 뜻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오늘이 불확실하고, 내일이 잘 보이지 않을지라도 연기(緣起)와 인과(因果)를 믿고 한 걸음씩 살 수 있다면 의외로 이 연리문 보듬이 하나에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 다 인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