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윤다 차살림법 : 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2부_26장
저 먼 옛날 상나라(은나라)를 세운 탕왕에게는 이윤(伊尹)이라는 재상이 있었다. 이윤은 본래 노비 출신이었는데 요리를 잘하고 똑똑한 데다 선견지명이 있었다. 그가 모시는 주인이 탕왕에게 시집을 가면서 함께 옮겼는데, 이윤의 명석함과 신비로운 능력을 알아본 주인아씨가 그의 신분을 해방하고 땅을 주었는데 그곳이 신야(薪野)다. 이윤은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하늘의 계시를 받아 비를 내리게 하거나, 풍흉의 기운을 알고 대비하는 능력이 있었다. 이에 많은 이들이 그를 존경했다. 이에 탕왕(湯王)이 그를 찾아 초빙의 뜻을 품었는데 이윤은 이를 겸손하게 사양했다. 탕왕이 세 번 그를 찾으니 마침내 이를 받아들여 출사하였으니, 이것이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다. 후에 촉한의 황제가 될 유비가 제갈량을 맞이하는 고사로 알고 있으나 그 일은 탕왕이 이윤을 맞이하기 위해 보인 예를 유비가 재현한 것이다. 이윤이 전설적인 재상으로 역사에 길이 남았고, 제갈량 역시 불멸의 영웅이자 재상으로 이름이 났으니, 삼고초려는 아무에게나 보이는 성의는 아니었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렇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이윤의 행보였다. 그는 탕왕을 보좌하여 하나라의 걸왕을 토벌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 이는 마치 주나라 무왕을 보좌하여 상나라를 쓰러뜨린 강태공이나 유방을 도와 항우를 무너뜨린 장량과 소하와 같아 보인다. 다만 이윤이 그들에 비해 더욱 크게 칭송받은 이유는 이후의 행적에 있다. 그는 탕왕의 뒤를 이은 외병과 그 이후의 중임 시절에도 재상으로 일했다. 중임의 사후 탕왕의 손자 태갑을 보좌하여 국정을 운영했는데 그가 포악해져 탕왕의 법을 어기는 일이 빈번해지자 그를 동궁(桐宮)으로 추방하고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허나 한 번도 스스로 왕이 될 욕심을 내지 않았으며 3년이 지나 태갑이 죄를 뉘우치자 다시 그를 왕으로 재차 추대하여 선정을 펼치도록 성심을 다했다. 이윽고 태갑이 훌륭한 왕이 되어 나라가 평안해졌다. 그는 태갑의 아들 옥정의 시대까지 살며 정치를 하다 죽었다. 《죽서기년》에서는 그가 태갑에게서 왕위를 찬탈하였으나 7년 뒤 태갑에 의해 죽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그 진위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가 다섯 명의 왕을 생애에 걸쳐 모셨고 존경해 마지않았던 탕왕의 사후 몇 번에 걸쳐 욕심을 낼 수 있는 일이 있었음에도 재상으로서 보좌에 마음을 굳힌 것을 보아 그의 성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그가 다섯 명의 왕을 모시며 국정 운영의 중추에서 벗어난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정권이 바뀌면 내각도, 인사도 모두 바뀌는 법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것은 하나의 법칙과도 같았다. 왕위를 노리는 시절부터 후보들은 냉혹한 정치의 세계를 살아야 한다.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이들의 도움이 필수다. 권력을 차지하고 난 후에 그들을 외면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도리어 권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논공행상(論功行賞)은 필수적인 조치다. 그런 상황에서 다음 왕의 시대가 되었는데도 재상의 자리에서 그 누구도 내려오라 말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면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만한 능력과 인품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현실 정치에서 본 적이 없어 무어라 쉽게 말할 수 없지만 이윤은 아마도 대단히 존경받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춘추시대 제나라 패자 환공의 재상 관중(管仲)과 함께 두 명의 위대한 재상으로 칭송했다.
이윤이 명재상이었던 것과 그가 국을 세상에서 가장 잘 끓이는 사람이라는 육우의 평가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그가 모셨던 왕이 탕(湯)이라서 그럴까. 관계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춘추전국시대에 걸쳐 훌륭한 정치를 이르는 비유적 표현이 바로 ‘국’ 즉 ‘갱(羹)’이었기 때문이다. 제왕의 정치적인 능력은 곧 국물의 맛을 제대로 아는 순간 생긴다는 비유적 표현이다. 국물이 지닌 다섯 가지의 맛의 조화는 마치 정치의 근본과 똑같다는 주장이다. 춘추시대 제나라의 또 다른 명재상 중 하나인 안영(晏嬰)은 안자(晏子)라 불린 위대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양두구육(羊頭狗肉)이니 귤화위지(橘化爲枳) 고사의 주인공인데 국과 관련한 멋진 말을 남긴 인물로도 유명하다. 좌구명이 지은 《춘추좌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노고송 17년(기원전 525) 12월 제경공이 사냥에서 돌아온 뒤 안자가 시종하고 있었는데, 대부 자유(양구거라는 인물)가 수레를 급히 몰고 와 진현했다. 그러자 제공경이 칭찬했다. ‘오직 양구거만이 나와 마음이 맞는구나(我和).’ 그러자 안자가 반박했다. ‘양구거 또한 군주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일 뿐입니다(同也). 그가 어찌 군주의 마음과 맞는 사람이겠습니까?’ 그러자 제경공이 안자에게 물었다. ‘和(마음이 맞음)와 同(비위를 맞춤)이 어떻게 다르오?’ 안자가 대답했다. ‘같지 않습니다. 화(和)는 마치 국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물, 불, 식초, 해(醢, 고기나 생선 등을 소금에 절이는 장류), 소금, 매(梅, 매실)로 고기를 조리할 때 먼저 땔감을 써서 끓입니다. 이어 요리사가 간을 맞추면서 제지이미(齊之以味, 양념을 넣어 맛을 맞춤) 합니다. 만일 맛이 모자란 듯하면 양념 더하고 지나치면 덜어냅니다. 그렇게 하여 윗사람이 그 국을 먹으면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군신지간도 이와 같습니다. 군주가 옳다 할지라도 그중에 불가한 것이 있을 때는 신하가 그것을 지적하여 더욱 완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군주가 틀렸다 할지라도 그 중에 옳은 것이 있을 때에는 신하가 이를 지적하여 옳지 않은 것을 제거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로써 정사가 공평하게 되어 예를 벗어나지 않게 되고, 백성들은 싸우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경》에 이르기를 ‘화갱(和羹, 간이 잘 맞는 국물)’이 있어 ‘계평(戒平, 조화를 이루어 싸움이 없음)’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양구거는 이와 다릅니다. 군주가 옳다고 하면 따라서 옳다 하고, 틀렸다 하면 따라 틀렸다고 합니다. 만일 맹물을 이용하여 맹물의 간을 맞추려 하면 누가 이를 마시려 하겠습니까? 동(同)이 도리에 맞지 않음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정 다 인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