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然으로 가는 길의 안내문 15
백로 날 아침 이슬은 맑고 깊은 고요의 거울이다.
맑기는, 잊고 살았던 굽이굽이 옛길들 다 비치고
깊기는, 과거 현재 미래 다 잠기고도 남으며
고요는, 감추고 감춘 부끄러운 죄의 숨 가쁜 맥박소리 들린다.
맨 먼저 비친 풍경은 마냥 아프고 부끄럽다.
반세기도 더 옛날 시집간 누님이
백로 무렵 노루재 당숲에서 ‘반보기’하던 날
친정어머니 껴안고 기쁜 듯 슬피 던 모습 비친다.
시댁은 해마다 며느리의 근친(覲親)을 허락지 않다가오 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말미 준 것이 반보기였다.
친정집과 시댁의 절반되는 거리에서 서너 시간 친정어머니 만나고는
헤어지고 울고 또 울어 여섯 살 난 나도 따라 울던 모습 비친다.
유교 가족 제도가 빚어낸 가슴 시린 풍경이다.여자만 얽어맨 여성 잔혹사였다.
두 번째 풍경은 더 아프다.
소련공산당 고급 당원, 우랄 노동자 동맹 조직자,
유대인이며 레닌의 동지였던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1879~1940)의 연인,
소련의 한인 사회주의자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1885~1918)이
총살되기 직전에 남긴 최후 진술이다.
“나는 나의 조국을 훔치거나 배신한 자가 아니다. 나는 공산주의자이며 조선인 혁명가다.
내 스스로 죽을 장소를 고르겠다.”
세 번째 풍경은,
9월의 순결한 태양 아래서 고개 숙여 여물어가는 벼들의 겸손한 넉넉함으로 전해오는 자연의 평등 숨결이다.
그리고 아직도 고개 빳빳 들고 있는 남성중심주의를 질타하는 여성들의 절규와
유린당한 영혼과 육신의 상처들이다.
성차별은 자연으로 가는 길을 막으려는 것이지만 끝내 그렇게는 안 된다.
참으로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차 한 잔 드십시오.
백로 날,
정 동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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