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然으로 가는 길의 안내문 08
사람이 하늘 이고 짓는 일 가운데서 농사를 으뜸으로 쳤던 때가 있었다. 농사는 하늘 뜻 내려받아 땅 위에서 그대로 이뤄내는 일이었다.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 했던 역사였다. 옛사람들은 농사지으며 하늘의 뜻을 헤아리려 애썼다. 그 헤아리는 지혜로 만들어 낸 것이 하늘 시계의 눈금인 24절기였다. 하늘 뜻이 땅에 닿으면 땅속, 땅 위의 만물은 일제히 움이 튼다. 새순이 나와 잎과 줄기로 자라고 꽃이며 열매가 생겨난다. 풀, 꽃, 나무 모든 것이 인간과 동물의 먹이가 되고 집이 되고 옷감이 된다. 약이 되기도 한다. 사계절의 색이 되고 풍경이 된다. 밤도 되고 낮도 되고, 사랑과 잠과 죽음이 된다. 약속한 시각이 되면 만남과 헤어짐은 완성된다. 생성과 소멸이 윤회의 강으로 흘러가고, 전설의 베틀로 짠 역사가 사람과 하늘의 비밀을 곱게 싼 때로 햇살과 바람을 쐬며 시간을 만든다. 농사는 그런 일이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꼭 그런 그만한 느림으로 씨줄이 되고, 그만그만한 빠르기로 날줄이 되어 모든 관계를 잣고 고운 수를 놓아 노래하고 춤추게 했다. 소만은 입하와 망종 사이에 있다. 여름이 시작되긴 했지만, 보리가 익는 망종까지는 아직 보름쯤 남은 때여서 양식이 될 만한 것이 모자라곤 했다. 봄부터 시작된 배고픔의 먼 길을 오는 동안 먹을 수 있을 만한 풀, 뿌리, 껍질은 거의 먹어치운 데다, 입하를 지나면서부터 식물에는 죄다 독성이 짙어지기 때문에 먹을거리는 더욱 부족했다. 소만을 앞뒤로 한 이 시기를 가파른 보릿고개라 불렀다. ‘小’자는 조금 모자라다, 조금 덜하다는 뜻을 지녔다. 땅 위의 모든 것이 조금 모자라고 조금 덜하다는 것이다. 오랜 굶주림을 채우려면 아직 때가 멀었다는 것이다. 때가 되기를 기다려야 하고, 그때는 하늘이 정해 두었다고 믿어야 했다. 그런 기다림에 대하여, 그런 하늘에 대하여 불만이 없지도 않았다. 훔치거나 빼앗거나 그보다 더 모진 짓을 해서라도 주린 배를 채우고 싶은 충동에 괴로워해 보지 않은 사람 없었다. 그러면서도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사람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 모두는 한 사람에게 한 사람은 모두에게 이웃이며 은혜라는 믿음으로 함께 견디고 기다리며 여기까지 왔다. 굶주림이 어찌 미덕일까만, 훔치고 빼앗고 죽여서 포만에 닿는 것도 미덕은 아니다.
조금 모자라고 조금 덜하더라도 때를 기다리며 차 한 잔 나누기를 빈다.
부디 모두에게로 돌아가는 길을 잃지 마시길.
소만 날,
정 동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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