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茶事茶難)한 하루 1화.
얼마 전 촉망받는 한 젊은 도자기 작가의 개인전에 다녀왔다. 이전까지 작업해 왔던 흙과 유약으로 빚은 접시와 다기류, 이전과는 다른 흙과 유약으로 해석한 다기와 보듬이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지하의 아늑한 공간에서 오롯이 펼친 작가의 백자를 보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어린 작가들 중 기수(旗手) 격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으니 뭇 차인들이 관심을 가질 만 했다.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드물어 호불호를 크게 타지 않을 듯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훌륭한 만듦새를 좇지 못하는 흙과 유약의 격이었다. 흥미롭게도 작가는 이에 대한 나름의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보듬이를 전시장에 꺼내 놓은 것이다.
작가는 이제 갓 보듬이의 세계에 발을 디딘 새내기였으나, 마치 후한 시대 수경선생이 어린 마량의 재주를 높이 사 그의 흰 눈썹 색깔을 빌어 백미(白眉)라 일컬은 것처럼 솜씨가 좋았다. 평강선생은 아직 배운지 일 년도 되지 않은 작가의 개인전에 수개월 간 갈고 닦은 보듬이 몇 점 전시하는 것을 허락했다. 작가는 밤마다 잠과 싸웠고, 낮마다 자신을 쉬게 하려는 나태함과 싸웠다. 그렇게 삼 개월 간 열 번이 넘는 실험을 되풀이 한 보듬이가 탄생했다. 그러나 명물(名物)이라 부르기에 한참 먼 이 몇 점의 찻그릇이 전시장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다기란 같아 보이는 모양새여도 사용자의 손 모양에 따라 사용감이 다르다. 게다가 일련의 형식을 정해 구운 그릇도 틀로 찍어 성형하지 않는 이상 갖가지 부위가 제각각의 역할이 있는 까닭에 불 아래 비추어 보고, 자리수건 위에 올려놓아 보고, 직접 잡아보지 않고서는 나에게 어울리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이것과 저것을 한데 묶어 진열하는 세트문화가 여전히 대세다. 이 세트와 저 세트가 숫자 구성이 다를 뿐, 무의미한 한데 묶기의 반복으로 찻그릇 전시란 대게가 지루한 법이다. 작가는 보듬이를 전면에 그것도 첫줄에 꺼내 놓음으로서 따분한 분위기를 지워내려 했다. 작가는 스승에게 배운 우리 흙과 유약을 거듭 실험했다. 사람들은 그 결과물을 잡아 볼 수도, 사용해 볼 수도 있었다. 심지어 전시하는 보듬이에 차를 직접 우려내어 관심을 가지는 관객에게 직접 쥐어주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 단정하고, 새롭고, 거대한 찻그릇을 손바닥에서 손끝까지 온전히 함께 마주하며 하나같이 감동했다.
그보다 몇 주 전 다녀왔던 교토의 출장길이 떠올랐다. 나는 그곳에서 대명물(大名物) 세 점을 보았다. 하나는 에도 시대의 것으로 요변(耀変)이 훌륭하며 가이라기가 덩어리 채 돋보이는 이도였다. 또 다른 하나는 유적(油滴)천목으로 중국의 것이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그 이름 높은 조지로의 검정라쿠였다. 일본에서 고려찻잔으로 부르는 이도는 기온의 가끔 들르는 갤러리 겸 골동품 점에서 보았다. 가이라기가 굵고 멋들어지게 피어서 밑굽의 가오리껍질 무늬가 한 눈에 보아도 두드러진다. 소장자가 바뀌기를 몇 번, 이윽고 본인의 가문에 들어왔는데 이마저도 수대에 걸쳐 보관하다 나온 매물이라 한다. 한 번도 공개한 적 없는 물품이라 수 천만 엔이 넘어가는 가격에도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유적천목은 중국 복건성에서 건너온 것으로 그 연배가 나머지 대명물들과 비교해도 크게 차이 난다. 오랜 세월에도 빛깔을 잃지 않고 영롱하게 반짝이는 유적(油滴) 무늬가 흔치 않아 역시 공개된 적이 몇 번 없었다. 이름 높은 검정라쿠는 라쿠미술관에서 일 년에 한 번 공개할까말까 하는 보물이었으니 이 세 가지를 모두 따로 놓고 보면 나는 참 운이 좋았던 셈이다.
명물은 좀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귀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보여 주면 소홀하게 취급할 수도 있고, 파손의 위험도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도 일리는 있다. 감식안도 없고 미적 취향이 준비되지 않은 이들에게 이것이 고양이 밥그릇과 다를 게 무어겠는가. 그러나 동시에 뛰어난 것일수록 많은 이들에게 경험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묻는 사람들도 있다. 훌륭함은 접할수록 좋은 영향을 주는 것 아닌가. 차인들이 대대로 명품을 가지려고 하는 이유는 단순히 소장욕구 때문만은 아니었다. 초기의 차인들은 흔한 것으로 손님을 충분히 대접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좀처럼 쓰지 않는 것을 내놓는 것이야말로 손님을 극진하게 대우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쌓이며 이러한 생각이 습관이 되고, 관습이 되자 좋은 그릇은 명기가 되어 사장(死藏) 당하기 일쑤가 되었고 차는 점점 고답적이고 소수를 위한 것이 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매일의 차를 즐길 수 있도록 차는 보다 가까워지고, 차살림은 생각보다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 할 필요가 있다.
세 점의 대명물 외에 아직 현세의 작가와 작품이라 그 축에는 끼지 못했으나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도 좋은 기회가 있을까 기대했으나 아쉽게 무산되었다. 라쿠가문의 바로 전대 가주(家主)였던 시로자에몬의 검정 라쿠였는데, 현재 오모토센케의 가주가 소장하고 애장하는 까닭에 당분간은 절대로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겠노라 답하고 거절했다고 한다. 이렇게 어렵고 우연하게 세 점의 대명물을 접한 것은 뜻밖의 행운이나 사실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야나기 무네요시는 1947년 5월 3일 일본도자협회가 주최한 쇼군 후마이코(不昧公) 시절의 대명물 일곱 점을 보고 간단한 소감을 남긴 적이 있다. “일곱 개의 명기를 마주 대하고, 역시 공개하는 것은 이를 사장하는 것과는 다른 사회적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이 공개에 대해 후마이코가 슬퍼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후마이코가 만약 오늘날에 살았다면 자진해서 이처럼 공개하는 일에 새로운 기쁨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후마이코가 이전과 같이 훌륭한 군주로 있는 한.” 좋은 그릇은 그저 바라보기보다는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편이 더 좋다. 물론 좋은 그릇을 그에 걸맞게 잘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야나기는 이에 대해서도 이렇게 언급했다. “특히 차인인 체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폐해가 많다. 사용법이 능숙한 사람이 반드시 잘 사용하는 사람은 아니다. 부자연스러움이 남아 있거나, 아니꼽거나, 허풍을 떨거나, 야단스럽게 하거나 하는 예는 너무나 많다. 순탄하고 자연스러운 사용법은 좀처럼 없다. 그것은 차를 너무나 어마어마한 것으로, 매일의 생활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것으로 보는 데서 오는 폐해이다. 명기를 제 스스로 다룰 줄도 모르는데 어찌 차인이라 부르겠는가.”
"명기를 제 스스로 다룰 줄도 모르는데 어찌 차인이라 부르겠는가"
훌륭한 부모이고, 뛰어난 상사이며, 든든한 친구이면서 어째서 차 앞에만 서면 사람들은 이토록 가벼워지고, 옹졸해지는 것일까. 대범한 결단력을 지닌 지인이 차 앞에서는 그렇게도 부자연스럽고 자유롭지 못한 꼴을 보며 덩달아 자리가 불편해진 일이 생각난다.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터놓는 사이였으니 그는 한껏 부끄러워하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물었다. 당시의 나는 아무런 답을 준비해놓지 못했기에 나는 그럴 깜냥이 되는 사람이 아니니 본인의 스승에게 다시 물어 그 답을 구하라 말하고 일단락 지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답 자체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차는 필연적으로 형식을 낳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민중을 위한, 다수를 위한 문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야나기의 말을 빌리자면
“그렇기에 우리는 차를 다시 한 번 자유롭게 놓아두어야 한다. 금력, 약속, 인습, 명문, 도구, 다실, 종가, 상인으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하다. 매어 있는 지금의 차에 진실한 차를 바라는 것은 어렵다. 초기의 자유를 되돌리지 않고서 차의 역사를 당대에 심화시킬 수는 없는 법이다.”
처음의 자유란 무엇이었을까. 보듬이가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처음의 마음을 잊고 형식에 함몰되어버린 시대의 유산으로부터였다. 보듬이의 기원이 되는 신석기 시대의 유물까지 거슬러 갈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는 중세 시대의 일본 차인들과 그보다 조금 더 이전 중국 차인들의 기개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 그들의 대담한 성격이며 예민한 안목을 엿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은 그들이 사랑했던 물건을 통해서 가능하다. 문헌상의 설명도 중요할 수 있지만 이는 그들의 심상과 취향을 직접적으로 느끼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초기의 차인들은 중국의 것이든 우리의 것이든, 옛 것이든 오늘의 것이든 시대와 장소와 목적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차를 생각하며 그릇을 볼 줄 알았다. 때문에 처음부터 우아하고 품격 있는 다기를 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던 물건도 찻그릇으로 바라볼 여유가 있었다. 잡기가 있는 그대로 찻그릇이 되기도 했고, 잡기의 자유분방함과 탈형식미에 감동 받아 새로운 형식의 그릇을 주문해 세상에 없던 찻그릇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도다완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 뿐 아니라, 중국에 건너왔다는 유적천목 역시 지금 보기에 값비싼 공예품처럼 보이지만, 원래 이러한 유적이 들어간 찻잔은 일본에서 저렴한 술을 담아 마시는 데 쓰였다. 흔하디흔한 그릇이어서 당시 일본에서는 자체적으로 많은 양을 만들어 보급했다. 이러한 그릇들을 명기로 떠받드는 것은 좋지만 이들이 처음부터 명기로 태어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 시작은 오로지 초기 차인들의 눈썰미와 새로운 형식의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태도가 한데 모여 비롯한 것이다. 야나기가 보았다는 후마이코의 애장한 물건이든, 좀처럼 공개하지 않는 오늘날 차인들의 유물급 대명물이든 간에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단단히 잘못 알고 있는 것은 명기란 그들 소수의 것으로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에 필적할 만 한 품격의 도자기는 이 세상에 얼마든지 숨겨져 있다. 혹은 아직 태어나지 못했을 뿐이다. 실로 멋지고 동시에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나는 어째서 오늘의 차인들은 이를 가려내는 자유와 독창성을 스스로 뽐내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젊은 작가가 전시실 뒷켠의 공간에서 전시하지 못한 보듬이 한 점을 가져와 수줍게 보여준다. 요즘 우리 세대 소비자들이 물건을 판단하는 척도는 대단히 간소하다. 예쁘거나 예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종합적이고 광범위한 기준점들의 분주한 연산활동의 결과물을 단순하게 이르는 표현인지는 확신하기 힘들다.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보다 본능적인 감상평에 가깝지 않을까. 어쨌거나 이 보듬이는 예쁜 물건은 아니다. 작가의 작품 치고는 드문 일이다. 하지만 이 보듬이는 무수한 실험의 과정을 모두 담고 있다. 작가가 요즘 무엇에 꽂혀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지 그 순수한 마음도 다 보이는 그릇이다. 이 작업이 결실을 맺어 참으로 볼만 한 보듬이가 언젠가 등장할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 녀석은 보관해 두었다가 반드시 전시장에 꺼내어 두고 많은 이들이 보고 보듬어 볼 수 있도록 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차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대로 오래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차 마시는 공간도 변화해야 하고, 기물에 대한 척도와 형태에 대한 변화도 그대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는 대명물이 태어날 때부터 명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떠받드는 것은 괜찮지만 이에 묻혀 다른 것을 깊게 보지 못해서는 얼마나 삶이 아쉽고 우스워지겠는가.
글. 정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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