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윤다 차살림법 : 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2부_6장
명주는 우리집 딸아이다. 청명 날에 많은 이들의 축복을 받고 태어났다. 올해로 만 세 살에 접어든 그녀는 항상 삐죽빼죽하다. 언제나 삐죽빼죽 튀어나온 머리를 찰랑거리며 뛰어다닌다. 입이 와룡산 만큼 튀어나왔다가 배시시 웃기도 하고, 여기를 쿡 찔러보고 또 저기로 달려가서 만사를 콕콕 눌러보곤 한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맘에 드는 색연필을 들고 어디론가 뛰어가 잔뜩 선을 그어 놓는 일인데 어떨 때는 엄마 아빠가 미처 찾지 못하도록 눈에 가장 띄지 않는 곳이 어딜까 골똘히 생각하기도 한다.
그녀가 두 살이 되었을 때 스케치북 한가득 선 긋기를 시작했다. 그림을 좋아하는 여느 아이들처럼 온종일 부여잡고 앉아 그리는 방식은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삐죽빼죽한 성격의 딸은 내킬 때만 짧고 굵게 놀았다. 한 가지 색을 고집했는데 어떨 때는 노란색 동그라미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리곤 했고, 어떨 때는 마치 병원의 심장박동기의 파동처럼 빨간색 물결만 그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몇 달이 지나고 어느 날, 명주는 그림 한 장을 홀연히 남기고 색연필을 휙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돌아보지 않고 인형으로 달려갔다. 하얀 도화지에는 삐죽빼죽한 선들이 가득했다. 열 가지 색이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만들고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나도 모른다. 아마 그녀도 모를 것이다. 말을 할 수 없던 나이니까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는 동다살림법을 만들고, 다듬고, 가르치고, 또 배우고 익히면서 몇 가지 중요한 자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차수건은 이러한 자세들에 관한 연습에서 아주 좋은 도구가 된다. 왜냐하면, 동다살림법에서 차수건의 역할은 마치 명주 앞에 놓인 하얀 도화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흰 캔버스 천 위에 무슨 그림을 그릴 것인가를 고민하는 화가처럼 차살림에 익숙해진 당신은 오늘은 어떤 기분과 마음가짐으로 오늘의 찻자리를 그려낼 것인가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저 하얀 광목천으로 만든 사각형 차수건 위에 놓일 도구들은 제각기 다른 색과 질감으로 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동다살림법에서 세트를 맞춰 통일감을 고민하는 일은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되려 그러한 태도를 지양한다. 어쩌면 귀찮거나, 가격에서 가성비가 좋아 고른 세트일 것이라 값어치를 낮게 보아도 괜찮다. 같은 작가의 것이라도 가능하다면 연도가 다르고, 형식이 다르다면 더 좋다. 이 작업을 생각했던 해의 그 사람과 저 작업을 도전했던 날의 그 사람은 우리 관점에서 전혀 다른 작가다. 물론 그러한 변곡점을 보여주는 작가가 흔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요는, 저 하얀 캔버스는 자유로운 상상의 공간이고 내 기분과 에너지를 발산하기 아주 좋은 놀이터라는 사실이다. 살면서 나만의 문법, 나만의 형식을 가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차문화라면 더욱 남의 눈치를 보고, 꽁무니를 쫓아가는 일이 빈번하니 아쉬울 따름이다.
사실 며칠 전까지 나는 딸아이가 액자 유리에 그려 놓은 그림을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호안 미로의 그림을 고화질로 프린트한 포스터로 꾸린 액자 두 점을 가지고 있다. 겨울에는 빨간 그림을 벽에 걸고, 여름에는 파란 그림으로 바꾸어 단다. 벽에 걸리지 않는 액자는 반대편 바닥에 기대어 세워 둔다. 딸은 빨간 그림보다 파란 그림을 좋아한다. <인물persontage>라는 작품이다. 눈 아래로 미간에서 인중으로 이어지는 구간의 검정 부분을 그녀는 우리집 고양이 이름으로 부른다. “니야(niya)다!” 이 그림을 처음 보고 그녀가 외친 말이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그 그림을 우리집 까만 고양이의 뒷모습을 그린 고양이 초상화로 만들어 놓았다. 고양이는 딸아이가 귀찮아 항상 뒤돌아서 등지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림이 누군가의 초상화를 현대주의 기법으로 그린 그림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 캔버스의 주제는 우리 아이에게 고양이 그림이 되었으니 그냥 우리 가족에게 저 그림은 그 순간부터 고양이가 되었다. 얼마나 만족스러운 감상법인가. 사람도 되었다가, 고양이도 되었다가, 그저 스쳐 지나갈 때는 풍경의 한 장면도 되었다가 하는 저 그림처럼 당신의 오늘 찻자리 역시 누군가의 해석과 정의에 사로잡히지 않고 조금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 펴면 자리가 되고, 접으면 사라지는 저 하얀 차수건은 그러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니까.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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