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윤다 차살림법 : 찻자리 위로 이야기를 펼치다 : 2부_1장
볕(日)이 잘 드는 땅에는 나무(木)가 잘 자라서 그 방향을 동(東)이라 했다. 고대로부터 중원을 기준으로 동북 3성은 실제로 중국의 오랜 목재 공급지이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현대에 들어와 갑골문이 발견되며 한자 학자들에 의해 그 설득력을 잃었다. 동녘 ‘동’자의 갑골문 원형은 곡식 자루를 묶은 모양이다. 그래서 초기에는 무언가를 묶는다는 의미로만 사용되었다. 방향을 뜻하게 된 것은 이후의 일이다. 익숙하지 않겠지만 처음부터 ‘동’자는 한 가지 의미로만 사용되지 않았다.
동국(東國)에서의 ‘동’은 동서남북의 동쪽을 가리키는 단순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가리킬 때 사용했던 단어다. 지극히 중국 중심의 단어다. 당연히 그렇다. 한자가 그들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 조상들은 꽤 오래전부터 자신을 동국이라 불러왔다. 우리나라가 중국의 속국임을 부끄럽거나 아쉽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자가 붙은 여러 말들을 남발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는데, 우리나라 근대 차문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동다송(東茶頌)> 역시 이에 속한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제목을 그대로 읽으면 ‘동쪽에서 나는 차를 기리는 글’ 정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동’이라는 단어는 방향을 지시하는 뜻만 가진 것은 아니다.
‘동’에는 오른쪽을 가리키는 뜻도 있다. 오른쪽의 어원은 ‘옳은 쪽’이었다. 물론 그 원형은 ‘옳’이다. 고조선이나 삼한 시대 무속 신앙에서 왼쪽을 길하게 여기는 문화가 다소 있었으나 청동기 사회 이후로 왼편보다는 오른편이 더 길하고 올바른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동양과 서양을 막론했다. 라틴어의 오른편은 dexter인데 이는 곧 옳고, 곧은 것을 상징했다. 라틴문화에 영향을 받고 이를 계승한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으로 오른쪽은 길하고, 성스러우며, 온당한 것으로 다루어졌다. 그래서 이는 법이 되기도 하고, 권리를 뜻하는 단어가 되기도 했다. 성서에서 오른편에는 신의 심판을 거쳐 천국으로 인도되는 자들의 몫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후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은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르네상스 예술의 중요 주제 중 하나인 피에타(Pietà) 역시 성모 마리아의 품에 안겨 죽어가는 예수가 언제나 오른편을 바라보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러한 전통적인 인식이 미켈란젤로의 작품 등 르네상스에 이르러 다소 재해석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오른편이 신의 방향, 올바른 것을 추구하기 위한 방향이라는 의미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이르기를 ‘오른쪽은 편리하나 왼쪽은 불편하므로 도움이 되는 것을 우(右)라 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좌(左)라고 한다.’는 정의는 이 주제에 관한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다. 중국의 신격 중 하나로 숭앙받는 관우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다듬기 위해 언제나 <춘추좌씨전>을 곁에서 떼어놓지 않았다는 일례가 있을 정도로 예법과 상식에 관한 고전으로 취급되었다. 조선 사대부들이 이를 불편하게 여겼을 가능성은 상식적으로 매우 낮아 보인다. 실제로 조선 시대 양반들은 오른쪽과 왼쪽을 높낮이로 구분해 문반과 무반을 각각 우와 좌로 구분해 놓았다. 길을 갈 때도 평민들은 왼편으로, 양반들은 오른편으로 다녔다. 그리고 권력과 실권을 잃은 경우를 좌천(左遷)이라 하지 않았던가.
<동다송>의 문제의 구절을 한번 보자. “혹 우리 차의 효험이 중국 것에 못 미친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색, 향기, 기, 미가 조금도 못 하지 않다. 차서에서 말하기를 육안차는 맛이 좋고, 몽산차는 약효가 좋다 하는데, 우리나라 차는 이 두 가지를 다 갖추었다. 만약 이찬황과 육자우가 지금 여기 있다면 내 말이 틀리지 않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우리 땅에서 나는 차에 관한 자신감이다. 그리고 과연 이를 대하는 우리에게 올바른 것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관한 물음이다. <동다송>의 협주(夾註)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지리산 화개동에는 차나무가 4~50리나 군집해서 자란다. … 좌선하는 승려들은 뒤늦게 딴 쇤 잎을 햇볕에 말린다. 하지만 나물국 삶듯 솥에서 끓여, 질고 탁하고 빛깔이 붉으며, 맛은 쓰고 떫다. 참으로 이른바 천하의 좋은 차가 속된 솜씨에 흔히 망가지고 만다.” 차를 다루는 승려들이 이러했는데 사대부들은 어떠했을까. 으리으리한 산방이나 아름다운 루(樓)에 한데 모여서 모임을 가지던 차회 회원들은 대부분 중국이나 일본의 차와 차도구를 썼고, 주체성 없는 차문화에 젖어 있었다. 글을 평생 배웠으나, 새로운 것은 제대로 공부해 볼 생각은 없었던 셈이다. 그들은 초의가 직접 덖어 온 차를 마셔보고서야 깜짝 놀라 그의 말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올바르다는 것은 내 안을 먼저 돌아보고, 발굴하고, 비판하고, 검증한 후에 선택하는 태도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는 유학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다. 당연한 듯 떠들고 가르치지만, 세상에는 입말 털기 좋아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언제나 드물었나 보다. ‘동다(東茶)’란 동쪽에서 나는 차라는 직역도 가능하지만, 그렇게 한정 짓는 것은 옳지 않다. ‘동다’는 올바른 차라는 뜻도 있다. 지금, 오늘, 여기에서 다시 찻자리를 꾸리는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마법 같은 주문이다.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이 땅에서 나는 물과 양분을 머금고 자란 우리의 차가 비로소 우리의 방식과 태도로 다루어질 때 올바른 차가 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백여 년 뒤를 사는 우리가 대답하고 있다.
정 다 인
Comentári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