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사람과 이야기 03
: 센 소탄 千宗旦
센 소탄(千宗旦)은 차의 성인(聖人) 센 리큐(千利休)의 손자다. 그는 센 리큐의 할복으로 궁지에 몰렸던 가문의 명운을 10대의 어린 나이에 짊어졌다. 리큐 후처 소생의 아버지도 있고, 본처 소생의 백부도 있었지만 리큐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히데요시는 3년의 봉문을 해제하라 명하는 편지 수신인에 소탄의 이름을 적었다. 히데요시의 차를 담당하던 여덟 명의 차인 중 하나였던 그의 백부 센 도안(千道安)이나, 이미 차의 달인이었던 아버지 센 쇼안(千少庵)도 아니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정치적인 냄새가 풍기지만 나는 그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이에 대응하는 소탄의 자세다.
그는 젊은 나이에 센 가문을 대표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일찍 은거하며 아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한 번 상상해 보길 바란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가문을 이끌어 갈 것인가? 전설적인 발자취를 남긴 시대 최고의 명사를 조부로 두고, 그 조부의 묏자리 근처에 심은 나무가 어른 키만큼도 자라지 않은 때라면 마땅히 그 이름을 만천하에 알리고 기리는 일을 해야 하지 않았을까? 나라면 강연도 다니고, 적극적으로 홍보도 하고, 유튜브나 인스타도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소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조부의 유산을 지켜내는 데 집중했다. 그는 이번에는 타의가 아닌 스스로 봉문하고 외부 활동을 삼갔다. 그 시간이 무려 십수 년을 넘었다.
태생부터 대 다이묘나 고관대작을 겸하는 귀족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가문의 문을 닫고 청빈하게 살았다. 할아버지는 차를 부처님 세계를 지상에 이룩하는 행위로 보았기에 손자는 그 뜻을 제대로 알기 전에는 마음의 문을 밖으로 활짝 열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어찌나 닮았는지. 할아버지는 스승으로 모셨던 다케노 조오의 차법을 젊은 나이에 이룩했지만, 그다음으로는 쉬이 나아가지 않았다. 세간에 명성을 크게 얻고, 천하를 대표하는 네 명의 차인 중 하나가 되었을 때도 그는 자신만의 길을 활짝 열지 않았다. 그는 이순(耳順)이 되어서야 자신만의 차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귀가 순해져서 누구의 말도 고깝지 않고, 불편하지 않아 마음이 항상 평온해졌기 때문일까. 그래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결심한 바가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생겼기 때문이었을까. 할아버지 센 리큐는 삼십 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스승의 가르침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이해하고 다시 고쳐 이해하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길을 열었다. 소탄이 문을 열었던 것은 자기 아들들을 장가보내기 위해서였다. 그의 아들들은 현재의 센케 세 가문을 열었고, 소탄은 이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어느 날 아들 소사(오모테센케를 연 인물)와 함께 대나무 화병 꽃꽂이 주문을 처리하고 있었다. 물론 꽃을 치고 꽂는 것은 전문가였던 이치베(市兵衛)가 맡았고, 그는 하나하나 세심하게 주문하고 가르쳤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끊으라, 어디에 창문을 내라(대나무 화병은 절과 절 사이로 크게 구멍을 내어 쓰는데 구멍은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 되기도 한다), 어디에 못 구멍을 만들라며 지시했다. 그러면서 먹으로 그림을 슥슥 그려내기 시작했는데, 아들이 가만히 보고 있자니 너무 빠르고 제멋대로 대나무를 치고 있는 게 아닌가. 참다못한 소사가 “아버지, 좀 더 생각하시고 먹을 치시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권했다. 그러자 소탄이 아들을 꾸짖었다. “그런 말을 하는 너에게는 아무도 꽃을 부탁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칭찬 받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니라. 심심풀이로 즐거워서 하고 있는 거지(慰みに作っているのだ).”
*‘慰み’는 위안이나 위로를 뜻하기도 하고, 심심풀이 혹은 즐거움, 편안함을 뜻하기도 한다. 장난이라는 뜻도 있다.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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