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듬이의 새로운 여행 : 유태근 작가를 만나다, 上
그릇 전을 이루는 곡선은 마냥 둥글지는 않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선은 가슴께에서 가파르다. 어떻게 보아도 둥그스름하니 보듬어 안기 좋아 보이지만, 어느 각도에서 보든 기울기가 달라 긴장감이 있다. 몸흙 바깥으로 뿜어져 나온 듯한 유약은 또 어떠한가. 지진에 갈라진 틈으로 흘러나온 뜨거운 용암, 긴 시간 식고 굳어 열기는 잃었으나 흐르는 모양새는 남은 화석 혹은 고대의 땅을 상상하게 한다. 움직이는 듯 굳게 멈춰 있는 묘한 착각 속에 지문 두 개가 당당히 들어선다. 청마 유태근 작가의 보듬이다.
작가는 더운 초여름의 오후, 작은 선풍기 한 대를 틀어놓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단출한 면바지와 반소매 셔츠 차림에 무심한 듯 뿔테 안경을 코에 걸치고, 흰 몸 그릇에 푸른 먹으로 시를 써넣고 있다. 큼지막한 손으로 깨알같이 작은 글씨들을 새긴다. 한 자 한 자 세심히, 그러나 망설임이 없다. 올해 잡혀 있던 나라 안팎 전시들이 무기한 중단되었다. 수많은 생명이 흡사 전쟁터의 한복판처럼 스러져가는 숨길 수 없는 시대의 민낯은 한동안 그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했다. 하지만 작가는 끝이 짐작되지 않는 고립을 묵묵히 일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레를 돌려 빚은 흙 그릇에 반야심경을 써나간다. 성경 문구를 촘촘히 새겨 넣는다. 시대를 고민하던 시인의 시를 붓으로 읊는다. 어려울 때일수록 긴 시간을 들여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작업을 시작한다. 하루에 세 번, 정성껏 차를 우리고 마시는 차인처럼, 작가는 삼십 오 년간 매일 반복해 온 일과를 되풀이한다.
흙은 그릇의 몸이자 개성이다
그 어떤 하루도 어제와 같지 않다. 오늘도 어제처럼 물레를 돌리고 흙을 굽고 붓을 들지만, 손에 쥔 그릇은 매일 조금씩 변화하기 때문이다. 원하는 그릇의 선, 색이 드러날 때까지 연구는 이어지고, 한 달에 스무 번, 많게는 마흔 번씩 실험 가마를 땐다. 유태근 작가의 작업에서 여러 해 변치 않는 주제는 흙이다. 사실 작가는 수십 년 동안 흙에 미쳐있는 사람이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제값을 주고 구매해 깨뜨린 다음, 단면과 파편, 가루를 분석해야 성미에 찬다. 자신만의 흙을 가지지 못한 도예가의 작품 세계는 한계가 분명하다고 믿는다.
99년도에 《문경도예지》 작업을 하면서 해발 800m 지역에서 발굴했던 조선 시대 가마터가 불현듯 생각났다. 10년이 지나 무작정 찾아 나섰다. 가마 높이와 거리를 고려해 보았을 때 작업을 할 때마다 도공들이 지게에 흙을 지고 오르내리지는 않았을 터. 그릇 빚을 흙이 있는 곳에 가마를 세웠으리라. 가마터 주변을 헤매다가 여덟 개의 가마터 중 맨 꼭대기 것에서 주위 흙과는 색이나 질감이 확연히 다른 흙을 찾아냈다. 지고 간 배낭 한가득 흙을 담아 내려와 단숨에 작업해나갔다. 유태근 작가는 그 흙으로 자신의 대표작 여러 점을 빚어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몇 해 뒤, 집 옆으로 길을 새로 내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사판 한쪽에 잔뜩 쌓여 있는 시꺼먼 흙이 눈에 띄었다. 현장 관계자에게 어디서 난 흙인지 물었다. 공사 때문에 아래를 파내다 보니 나온 흙인데, 벽돌 공장으로 보내기로 했단다. 양해를 구하고 흙을 조금 얻어 곧바로 작업실로 달려갔다. 이리저리 만지며 그는 이 흙이 예사롭지 않다고 확신했다.
옛 도공들은 생활에 필요한 그릇이나 항아리보다 큰 도자기는 쉽게 만들 수 없었다. 흙 때문이었다. 20세기 중엽 이후, 조형 토가 수입되면서부터 한국 도예에서도 큰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설치 작업도 가능해질 정도로 조형이 쉬워진 덕에 작가들은 너 나 없이 조형 토에 빠져들었다. 누구나 일정 기간 연습만 하면 물레로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니 대중성 측면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달리 말하면, 조형 토 없이는 작업할 수 없게 된 작가가 흔했고, 흙의 성질을 가르치고 배우고 이해하는 학생이나 작가는 점점 줄었다. 도예가 자신만의 흙을 발굴해내고자 애쓰는 이는 더욱더 드물었다. 이윽고 대다수 작가의 작업이 비슷비슷해지기에 이르렀다. 유태근 작가는 이 틀을 깨부수고 탈출하고 싶었다. 그러한 그에게 탈피의 실마리를 던져 준 것이 바로 이 흙이었다.
공사장으로 되돌아가 50t 어치 흙을 그 자리에서 계약했다. 가까운 한 후배는 이 흙에 간절토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유태근 작가가 얼마나 절실히 흙을 구하고 연구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간절토를 몸흙 삼아 도예 작업을 하는 내내 그 흙에 관해서도 조사를 해나갔다. 흙의 개성으로 추측하건대, 긴 세월 퇴적을 거듭하고 거듭하며 만들어진 흙이리라. 그 흙에 관해 이곳저곳 수소문을 한다. 알고 보니, 문경 너른 들판 어디든 파 내려가면 그 흙이 묻혀 있었다. 산세 험준한 문경 땅, 산자락 사이 들판이 아직 물 아래 잠겨있었을 때라니. 짐작할 수 없이 먼 시간이었다. 그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이 흙으로 실험적인 옹기 작업, 대단히 규모가 큰 도예 작품들, 그리고 보듬이 대표작들을 빚어냈다. 주인공 보듬이 역시 그러하다. 사람이 이 땅에 터를 잡기도 전, 언젠가부터 물에 씻기고 쌓여 잠자고 있었을 흙을 볕 아래로 퍼 올려 빚은 그릇이라니.
그러니 주인공 보듬이가 온몸으로 뿜어내는 예스러운 자태는 짐짓 꾸며낸 것이 아니다. 과거의 명성을 좇아 유물을 재현하려는 어떤 시도와도 다르다. 오히려 그릇 표면을 종이처럼 펼칠 수 있다면, 흰색 탐구, 평면과 율동 등의 제목이 어울리는 추상 미술 작품 같겠다. 그릇의 쓸모나 모델로 썼을 법한 사물이 짐작도 안 된다는 면에서 현대적이다. 고대의 흙으로 빚었으나 더할 나위 없이 새로운 얼굴이다. 이 미묘한 간극과 균형이 유태근 작가의 개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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